우리나라가 2009년 상반기 세계 500대 슈퍼컴퓨터 리스트에 단 한 대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며 ‘슈퍼컴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과학기술 부문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원천으로 꼽히는 슈퍼컴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3일(현지시각) 독일 함부르크 ‘인터내셔널슈퍼컴퓨팅콘퍼런스(ISC) 2009’에서 공개된 세계 500대 슈퍼컴 리스트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1993년 순위 집계가 시작된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대도 500위권에 들지 못했다. 세계 슈퍼컴 리스트는 성능에 따라 상위 500대를 선정해 매년 6월과 11월 두 차례 발표된다.

한국은 지난해 11월에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구축 중인 슈퍼컴 4호기가 277위로 유일하게 500위권에 들었지만 다른 나라의 슈퍼컴 성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이번 발표에서 제외됐다.

우리나라는 슈퍼컴 성능 합계 기준으로 국가 순위를 매기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한국의 국가 슈퍼컴 순위는 2003년 한때 6위까지 올랐으나 2006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이후 지난해 31위까지 떨어졌다. 올해는 500위권 슈퍼컴을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하면서 아예 집계 대상에서 빠졌다.

반면에 같은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이 가장 많은 21대를 리스트에 올렸으며, 일본(15대), 인도(6대) 등의 순이었다. 싱가포르·대만·홍콩 등도 각각 1대로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는 IT 강국을 자처하지만 유독 슈퍼컴 분야에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뒤처졌다. 중동 및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확대하면 상위 500대 슈퍼컴을 각각 5대와 2대씩 보유한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열세다. 구축 중인 KISTI 4호기와 기상청 3호기가 올 연말을 전후로 완료되면 다음 집계에선 순위에 들겠지만 이들 외에 대안이 없다.

전문가들은 슈퍼컴이 계산과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는 물론이고 금융(리스크 관리), 자동차·항공(시뮬레이션), 에너지(자원 탐사) 등 산업계에도 활용도가 높아지는만큼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해외에선 오래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슈퍼컴 육성에 힘썼다. 올해 500대 리스트 중 절반이 넘는 291대를 보유한 미국은 1990년대 이후 고성능컴퓨팅법, 첨단컴퓨팅부흥법 등을 통해 슈퍼컴 구축 및 활용을 지원했다. 미국은 과학재단, 에너지국, 국방부 등이 정기적으로 20여개 슈퍼컴 사이트를 업그레이드한다.

중국은 일찍이 자체 개발 노선을 채택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세계 15위로 이름을 올린 상하이슈퍼컴퓨터센터 슈퍼컴은 중국업체 서광이 AMD 칩을 활용해 자체 개발한 서버로 구성됐다.

수년간 논의 단계에 머문 슈퍼컴 육성법 입법작업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슈퍼컴법은 지난 2007년 김영선 의원 주도로 설명회가 열리면서 가시화하는 듯했지만 이후 각종 정치사안에 밀리면서 제자리걸음이다.

정부 지원책도 인프라 확충뿐 아니라 이를 활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지수 KISTI 슈퍼컴본부장은 “기본 인프라를 갖춘 후 학계와 산업계가 이를 활용해 새로운 결과물을 얻어내고, 이 결과물을 다시 슈퍼컴 인프라에 투자하는 순환 생태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